[인터뷰] 지역과 교회를 잇는 중간다리, 김경태 식구

▶ 어떻게 입교하게 되었나요?

먼저 저희 어머님께서는 36만 독신가정으로 축복을 받으셨고, 둘째누님이 6500가정, 형님과 셋째누님이 3만가정이십니다. 저는 4천만가정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430가정이셨던 고모님이 소개를 해주셨고, 5학년인 12살 때부터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성화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군 제대 후에는 기동대 활동도 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구교구에서 기동대 활동을 하면서 선문대 신학과에 들어가려고 공부했었지만, 영적인 경험을 하고서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광명에서 일하다가 축복을 받고, 가평으로 이사 와서 다시 다문화센터와 설악마을공동체를 만들고서는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0대와 30대 때 영적경험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공작을 했었는데, 교회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식구님이 교회에 오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리에서 딱 일어나서 문을 열면서 ‘식구님 어서 오십시오~’ 라고 말했는데, 마침 오실 것 같았던 그 식구님께서 ‘어떻게 알았냐’고 하시면서 화들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 번도 비슷한 경우인데, 식구님들과 대화하던 도중에 어떤 식구님 두 분이 교회로 오는 느낌이 들어서 ‘식구님, 지금 밖에 나가시면 식구님 두 분이 오시니까 잘 맞이해주시고 들어오게 하세요.’라고 말했는데, 정말 식구 2명이 저를 찾으러 온 적도 있었습니다. 잠이 들면 예지몽 혹은 몽시를 통해서 식구님들의 상황을 보기도 했었고 계시를 받고서 움직인 적도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졸음운전으로 크게 사고가 났었는데 차는 완전히 부서졌지만, 다친곳 없이 멀쩡히 살아남은 적도 있었습니다.

▶ 인생에서 제일 반짝였던 때가 언제였나요?

기동대 때가 제일 반짝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아버님이 대구에 온다고 하셔서 버스 동원을 해야 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때 임지 활동하는 36만쌍 일본 언니들과 대구 두류공원에 가서 활동했었는데, 할아버지들이 고스톱 치고 바둑 두고 있는 곳에 가면 10명 20명 앉아 계시는거에요. 그래서 제가 비집고 들어가서 참가정에 대해서 막 이야기 하는거에요. 방언 터지듯이 참가정에 대한 멘트가 나오고, 그렇게 신나게 멘트를 하면, 일본 언니들이 한분 한분 참석카드를 작성받는 식으로 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멘트하면 일본 언니들이 참석카드 받고, 제가 저기서 멘트하면 참석카드 받고, 그렇게 신나게 정말 재밌게 활동을 했었습니다. 노인대학도 가고 노인정도 가고 대회 당일 갑자기 난리 났다고 전화가 온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안 왔나 하고 걱정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 가지고 큰일 났다는 겁니다. 그때 욕이란 욕은 엄청나게 먹었어요. 버스는 7대가 준비됐는데 10대분의 사람들이 오셔서 버스 태워달라고 하니까 큰일이 난 거죠. 그래서 사정사정해서 죄송하다 말씀드리고 다음에 또 기회 있으면 초대해드리겠다 하고 말하고 왔습니다. 다른 것도 많이 있었지만, 이 때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교회에서 활동할 때가 가장 반짝였던 것 같습니다.

▶ 다문화센터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약 15년 전 먼저 광명에서 다문화센터를 만들었었습니다. 식구님들께 도움이 되고, 시민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서로가 융화되고,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조성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광명다문화센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가평에 이사를 오게 되었고, 가평에서도 다문화센터(가평국제문화교류센터의 전신)를 만들었는데, 수토이사 권사님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공동으로 만들 수 있었고, 그때에도 교회를 돕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목적에 맞게 활동을 하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가평을 중심으로 다양한 봉사활동과 지역 활동을 했었습니다.

▶ 그럼 설악마을공동체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건가요?

가평다문화센터 초기 회장으로서 3년에서 4년 정도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 갑자기든 생각이 ‘지금은 시민 네트워크다. 지역 공동체다. 다문화는 없어지고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하는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되면서, 가평 다문화센터를 넘겨주고 설악마을공동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설악마을공동체도 다문화라는 개념을 넘어서서 지역에 융화돼서 같이 갈 수 있는 단체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현재, 사회에선 다문화라는 단어를 잘 안 쓰려고 합니다. 시대에 맞게 참부모님 말씀을 해석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세상 흐름에 맞게 변화해야 합니다. 지금 마을공동체 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10년 전부터 그 내용을 알고 마을공동체를 준비한 것입니다. 그렇게 설악마을공동체를 통해서 군민들과 소통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식구님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으로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 설악마을공동체에서 활동을 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사실 너무 힘들어서 김동우 교구장에게 울면서 하소연했던 적이 있다. 나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으니 그것이 너무 섭섭했고, 손을 잡아주었고 그때 너무 감사한 마음이 커서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떠나려고 했던 이유는 안 알아주니까, 안 도와주니까, 지금도 안 도와주고 있지만, 다른 곳과 비교해서 우리만 도와주지 않으니 너무 섭섭한 때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외부에서는 설악마을공동체는 통일교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가운데 껴서 너무 힘들고 억울할때도 너무 많아서 힘든적이 많았습니다.

▶ 그럼 이런 힘듦 속에서 설악마을공동체의 활동계획은 어떤가요?

저는 교회에 도움을 주고 싶어서 설악마을공동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통해서 전도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공동체를 통해서 교회와 지역이 융화되는 것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전도가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말로 하는게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중간자의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벽화 봉사활동을 모집하고 학생들을 차에 태우고 봉사활동을 하러 갔습니다. 차에는 2세아이들도 타고, 2세가 아닌 학생들이 같이 타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하는 말이 ‘선생님 종교가 뭐에요?’ 라고 물었고, 통일교라고 대답하니까, 2세가 하는 말이 야 이봐 우리 통일교회도 좋은 일 많이 한다. 너희들도 통일교 들어와라.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저는 그런 모습을 바라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고 보이는 모습으로도 끌려들어 올 수 있는, 그렇게 세상과 교회에 중간자의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김경태 식구는 효정봉사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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